중세유럽의  다운이불


[ 프랑스에서 다운 이불 : Duvet의 어원 ]

프랑스어의 Duvet도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지만 속어로 Coucher Surle Duvet로 "사치를 부리다""사치를 낸다" 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직역을 하면 "우모이부자리로 잔다"라는 의미가 되는 셈이지만, 이러한 행위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사치스러운 생활의 형태인지도 모릅니다.
북유럽 사람들의 생활과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 사이에는 자연주의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는 듯 싶습니다.


어원사전 등에서 어원의 "Down"이라는 말을 사용한 예로 14세기의 "쵸이스"를 들수있는데, 쵸이스는 랭커스터 공의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1340 ~ 1399) 첫번째 부인 브라운 슈의 죽음에 임하여 "공작부인 브라운 슈의 죽음"이라는 시를 썼다. 이것은 브라운슈의 찬사와 남편인 랭커스터공을 위로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그 한 귀절에는 "만약 그가 순백한 비둘기의 솜털로서 나를 잠깐이나마 잠들게 해준다면 나는 외국제 샤틴의 훌륭한 원단에 금으로 수놓은 빛나는 우모이부자리를 바치겠노라" 라고쓰고 있습니다.

[ 영국에서 다운 이불 ]

영국에서도 프랑스와 같이 우모침구가 사치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4세기경에는 우모가 점차 생활용품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오델로"에서도 다운베드가 등장하고 있고 또한 베니스 상인에서는 랜스로트가 자신의 손금에 대하여 말하는 구절에서는 "이탈리아를 온통 찾아봐도 이토록 좋은 손금이 또 있을까?" 라고 말하면서 장수하는 손금, 여자운이 좋은 손금이라고 늘어 놓고는 끝에가서 "깔아놓은 오리털이불의 깃에 걸려넘어져서 생명을 잃을지도 모를 손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밖에 "안토니아와 클레오파트라"에서 "백조의 부드러운 털" 겨울야화에서는 "비둘기의 연한 털"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즉,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영국에서도 우모제품의 실용화가 이루어졌음을 이들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보급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음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절대 왕정하에서 부유한 상인들은 이미 다운침구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런던 상인들의 힘은 막강하며 우아한 생활조건을 창조해 냈습니다. 1525년에 죽은 J.보스의 재산목록에는 샹들리에, 쿠션, 카페트와 침대, 우모이부자리, 모포, 베개가 기록되어 있으며, (M.리즈의 "런던의 서민생활사"). 우모침구는 이 시대의 영국에서 부유한 상인들의 소유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였습니다.


[ 북유럽에서 다운 이불 ]


북유럽에서는 진술한 바와 같이 조류와 인간의 공생이라는 생활구조가 우모의 이용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이런 생활양식이 아닌 지역에서 우모침구는 무척 비싼 고가품으로 거래 된 듯 싶습니다.

우리들 눈에 비친 우모침구에 대한 기록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이킹족장들의 예를 포함하여 왕후, 귀족의 것까지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유럽에서는 이미 상당히 널리 여러지역에 우모침구가 보급되었던 것 같으며, 조직적인 제품생산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 독일에서 다운 이불 ]

중세 독일지역에서는 "케매나티"로 불리는 거실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이 침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방에는 벤치가 놓여졌고 우모의 쿠션이 그위에 놓여있습니다.
(오토. 폴스트의 "중세유럽 생활지"). 이 책에서는 기사들의 침상에는 겹쳐진 풀다발이 사용되었고 오리털이부자리의 사용은 성을 가진 성주 등에 한정되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또 이책에서는 중세초기의 하층민과 농민들은 아직 침대를 갖지 못하고 풀을 깔아 놓은 침상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쓰여졌으며 침대를 가지고 있었던 부류는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침상에는 베개, 이불등이 있고 면모포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1485년의 여행기에는 오버캘룬틴, 동티롤의 농가 등에서 우모이불이 사용되었다고 적혀 있으며, 이 지방에서 거위(Goose)를 많이 사용했다고 하는 사실과 관계가 깊다는 내용도 발견됩니다.
여기에서도 북유럽과 같이 인간과 조류가 공생하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중세유럽 다운 침구의 보편화 ]

즉, 이러한 생활구조를 가진 곳에서는 일찍부터 우모이불의 보급이 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유럽 각지의 우모이부자리가 보급된 역사가 이미 중세기경부터 시작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런던의 상인이나 성을가진 성주 등 "부유한 사람들"이 가졌던 우모침구는 어떻게 생산하였으며, 공급되었을까를 살펴보면, 한 예로 스페인의 청년들은 주로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보르니아에 파견되었는데, 스페인의 기숙사는 1367년 설립되었지만, 기숙사의 규약(1558년)에는 기숙생의 각방에 사용되는 가구, 침구 등의 목록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침대(매트리스 포함), 이부자리 (마로 된 것과 우모로 된 것, 시트 4매), 베게 (우모 또는 모로 충전)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숙생은 30명정도로 많은 인원은 아니나, 우모침구가 어느 정도 상품으로 유통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설비를 갖추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다운 침구의 사회적 생산체제 ]

그러나 그것들을 생산하는 측면에서 자료를 살펴보면 매우 보잘 것이 없지만, 1623년 토만 칸프넬러가 발표한 "태양의 도시" 중에는 공동체 주민들은 노인이든 신체장애자이든 모든 사람은 사회적 생산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노인들은 의견을 제시하는 고문역할, 손발장애자는 감시원 역할을 하게 되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양모를 깍는다든가 아니면, 우모를 선별하여 침상이나 다운이부자리에 넣을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는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운 침구의 사회적 생산체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출처 : 우모의 세계
저자 : 김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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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속의 다운 이불


[안델센 동화속의 다운 이불]

우리에게도 널리 잘 알려진 안델센 (H.C. Andersen)의 동화중에는 "완두콩 위에서 잠을 잔 규수" 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줄거리를 대략 간추려 보면 어느 날 왕자가 황태자비를 맞이할 목적으로 세계일주에 나서게 된다. 황태자비가 될만한 감성과 자질을 갖춘 "진정한 규수"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끝내 적합한 감성과 자질을 겸비한 규수는 찾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왕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며칠 후 , 심한 비바람의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날 밤이었다. 이 떄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하인이 문을 열자 비에 흠뻑 젖은 한 소녀가 서 있었는데, 그 소녀는 "제가 왕자가 찾고있는 진정한 규수입니다"라고 말하였다.
 하인은 그 소녀를 성안으로 맞이하였고, 이윽고 왕비에게 인도되었다. 왕비는 하인으로 하여금 침실의 잠자리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왕비는 이때 침상위에 모든 이부자리를 걷어치우고 한톨의 완두콩을 갖다놓았다. 그위에 20장의 요를 깔고 또 그위에 보드라운 우모이불을 겹쳐놓았다. 그리고 그 소녀를 그 침대에 잠을 자도록 하였다.


이튿날 아침, 간밤에 잠 잔 기분이 어떠했느냐는 왕비의 질문을 받은 소녀는 "아주 힘들었어요, 무언가 딱딱한 것 위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온몸이 빨갛고 파란 자국까지 생기고 말았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 소녀는 "진정한 규수"로 인정받게 되었다. 20매의 요와 겹쳐놓은 우모이불 밑의 완두콩 촉감까지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섬세한 감성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로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그 소녀는 황태자비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덴마크나 스웨덴에는 이런 종류의 동화가 있다. 즉, 우모침구가 갖고 있는 수면효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다운이불의 실용화 ]

파스칼.데이비의 "침실의 문화사" 에서는 우모침구의 실용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우모중에서 굵은 우모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곳은 노르웨이 북부와 아이슬랜드에서 였다." 외측을 모피로 예술적으로 장식한 침대에서 사람들은 몸의 아래 또는 위에 우모로 만든 이부자리를 몇장이고 겹쳐 사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 우모란 어떤 것인지 인용해보면, "에돌돈(혹은 에델돈 1700년)은 오리의 솜털로서 이 우모가 사용된 것은 북유럽의 강가를 따라 서식하는 이 조류가 그 풍토에 알맞게 서식 또는 사육됨으로써 얻어지게 되었다" 즉, 안델센 동화속에서 등장하는 우모이부자리의 우모와 동일한 오리의 우모이다.

이와 같이 우모를 얻게된 기술은 "어느 어부의 작은집 옆에 작은 배가 뒤집혀 있었으며, 한쌍의 오리들은 그 작은 배속으로 둥우리를 만들기 위하여 들락날락하다가 인간으로부터 모이를 얻게 된다. 그 대신에 인간은 그 오리의 솜털을 채취하여 이불에 채워 넣어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인간과 조류의 공생이 시작된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우모를 채취할 목적으로 특정한 종류의 조류를 사육하는 방법이 발달되고 있었다. 즉, 오리 솜털이 보온효과가 뛰어나다는 인식을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어떻게하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려면, 솜털 등을 충전물로 이용하여 이부자리를 만든 최초의 시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인간과 조류의 공생이라는 생활모습이 북유럽의 거친 자연환경속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침구의 문화사"에서는 스웨덴 중부의 "다라칼리아"농민들이 만든 방의 침실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돌타일로 만든 큰 난로와 도자기제의 스토브 등 이들 난로와 스토브가 방을 따뜻하게 하고 복사에 의한 난방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 방의 침대에는 우모이부자리가 사용된다. 복사난방과 함께 우모이부자리를 사용함으로써 쾌적한 수면을 취하게 되는 방식이 스칸디나비아 각 지방에 널리 퍼져있다.


[유럽에서 다운 이부자리의 보급]

9세기 노르웨이의 통일을 이룩한 아서여왕의 묘(우서베리船墓선묘)가 1904년 발굴됨으로써 바이킹시대의 왕후생활과 그 시대 생활양식등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썰매나 마차, 천막, 침대, 의자, 주방용구 등의 부장품과 함께 여왕의 묘실은 직물이나 벽걸이로 장식되어 있으며, "시트나 의복외 침구나 방석은 거위털 제품으로 되어 있음을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쾌적함과 아늑함을 선호하는 마음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센스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루돌프.펠트나의 "바이킹 사거" ), 덴마크의 동북부 휴넨지역에는 "레드비"족장의 묘선에서도 죽은 사람이 오리털 이불로 싸여 잠들어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덴마크 중부의 유트란드지방의 맘메인 호족의 묘소에서는 떡갈나무의 목관속에서 죽은 사람이 거위털 이부자리위에 편안히 뉘어져 있었으며, 금자수의 실크 소매자락 차림과 가늘게 짠 실크혁대를 차고 보석으로 장식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즉, 이미 9세기경부터 북유럽에서는 우모침구가 보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어의 Down 은 노르웨이어의 Dunn을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독일어의 Dunn도 여기서 유래되었으며, 현재의 독일어 Daune로 변천하게 되었다.



출처    : 우모의 세계

지은이 : 김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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